# 1차 오일쇼크

1차 오일쇼크는 1970년대에 제4차 중동전쟁과 함께 찾아왔다. 이 오일쇼크는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석유 장관인 '아메드 쟈키 야마니'가 주도했다고 하는데, 그는 OPEC의 석유 금수 조치에 대해 큰 의미가 없다며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제 3차 중동전쟁 이후를 보면 결국 그의 말 대로 금수 조치가 큰 의미가 없던 셈이 되었고, 이어서 그는 제 4차 중동전쟁 때 매월 단 5%만 감산해도 시장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는 성공적으로 작용하여 1배럴 당 2.9달러였던 원유가가 한 달 만에 12달러까지 치솟게 된다. 그리고 이 틈을 타 소련을 포함해서 베네수엘라, 인도네시아, 나이지리아도 석유 가격을 대대적으로 인상시킨다.

중동과 베네수엘라, 가봉 등의 산유국들은 엄청난 호황기를 맞이했고, 소련도 큰 이득을 보았다고 한다. 반대로 미국과 영국은 큰 타격을 입었고, 당시 저유가가 상식이었던 세계 경제 또한 만만치 않은 타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오일 쇼크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 시장 질서 주도국을 뜻하는 스윙 프로듀서의 직위를 얻었다고 한다.

한국은 어땠을까? 이 당시 한국은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던 초기였어서 자칫하면 이게 중단될 뻔 했다고 한다. 물가 또한 1년 사이에 25%나 상승했고, 중동에서 막대한 외화자금을 벌어오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유동자금이 대거 자산시장으로 쏠리면서 부동산 투기붐과 건설주 광풍이 불고, 주요물자가 부족한 현상이 만연했다. 이 영향으로 물가 상승률은 1970년대 중후반 내내 10%대를 유지했다고..

 

# 2차 오일쇼크

2차 오일쇼크의 원인은 1979년 이란 혁명이었다. 이로 인해 발생한 파업으로 하루 60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던 이란이 200만 배럴까지 축소하고, 여기에 이란-이라크 전쟁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까지 겹쳐 원유는 배럴당 40달러까지 치솟게 된다. 문제는 이란 혁명 이후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정권을 잡는데에 성공하고 석유를 증산했음에도 이 문제가 나아지지 않았다. 산유국들이 공급이 안정적으로 회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상승하자 상승한 가격 그대로 원유 가격을 고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러면서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물가는 상승하고 실업 문제는 더욱 심화된 것이다. 미 연방준비제도에서는 급격하게 불어난 달러를 미국 은행으로 회수하기 위해 금리를 21%까지 인상했다. 이 때문에 비산유 개발도상국에서는 졸지에 빚을 산더미처럼 지게 되는 상황이 발생해 1차 오일쇼크보다 더 큰 침체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이 당시의 고금리 정책은 오일 쇼크가 끝난 뒤에도 지속되어서 1980년대 중남미와 동유럽 외채 위기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앞서 언급했듯, 이 무렵 한국은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던 시기였다. 1차 오일쇼크에서도 이미 큰 타격을 입었을텐데, 2차로 연달아 오일쇼크가 찾아오면서 1차 오일쇼크 시절 대비 중화학 공업이 성장한 이 시기에는 더더욱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물가 상승률은 1978년에 14%의 물가 상승률에서 1979년는 18%로 상승하고, 1980년에는 최고 29%까지 물가가 상승한다. 자고 일어나면 물가가 계속 오르는 이 현상 때문에 사재기도 기승이었다고 한다. 설비 투자 증가율은 꺾여져 파산, 해고가 급속히 늘어 본격적인 불황으로 접어드는데, 오죽하면 78년과 79년 1년 새 임금 체불액이 7배나 상승했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공산권 붕괴에 이 오일쇼크가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동유럽 국가에서 서구권으로부터 끌어모은 많은 빚이 갑작스럽게 터진 오일 쇼크로 인해 수출액이 줄어드는 문제가 생기고, 갚아야 할 부채가 급증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긴축 재정을 시행하기도 했고, 국민들 사이에선 복지가 점차 축소되고 있으니 불만이 터져 공산 정권을 지탱하던 토대마저 휘청이기 시작한다. 여기에 공산권 대표 국가였던 소련마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까지 겹쳐 이에 대한 막대한 수습 비용 등으로 인해 본인들도 무너지기 시작하여 1980년대 말에 공산권이 붕괴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Posted by 새우아저씨
,